'2008/10'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0.15 그래도 기획서는 필요하다 (2)
  2. 2008.10.05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기획서 (21)

그래도 기획서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서는 필요한데, 언제일까요?

  • 테스트할 때 - 정상적인 동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 연관된 작업을 할 때 - 기획자나 프로그래머나 다른 작업과 모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 또는 기능을 손질하기 위해서 돌아볼 일이 종종 있습니다
  •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 기획자나 프로그래머에게 물어봐도 모릅니다
  • 매뉴얼을 작성할 때

기획 단계에 작성했든 개발 직전에 작성했든, 설계 문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개발이 진행 되면서 바뀌는 내용에 대한 지속적인 갱신이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모든 프로그래머는 코딩이 끝나는 순간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법인데(네, '모든'이라고 썼습니다), 따라서 최종 산출물로 문서를 작성하라는 요구에는 강력히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을 줄이면 어떨까요? 보통 사용자 스토리에는 자세한 작동 방식을 담지 않기 때문에, 개발이 끝난 다음 상세 명세를 첨부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루 분량의 스토리에서 구현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기 때문에 스토리 단위로 문서를 작성하되, 짝과 기획자, QA 담당자와 함께 검토하면서 작성하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적인 테크니컬 라이터가 있으면 훨씬 좋겠지만요.

신고
Trackback 0 Comment 2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기획서

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릴 때부터 게임 기획자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 회사원이오! (매일 사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면서, 뭘 하고 돈을 받는 거죠?) 그렇다고 뭐 싹수가 보이는 훌륭한 기획자 지망생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제 청소년기는 온전히 게임 디자인 동호회에서 보냈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게임 기획자로 현업에 데뷔했죠. 열심히 일했고, 오랫동안 준비했기에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 순간, 마침내, 게임 기획자의 길에서 도망쳤습니다! 단 하나 외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길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뭘 하면 좋을지 전혀 모르게 되어버렸었어요.

저는 이제 8년차 게임 서버 프로그래머입니다. 저는 지금 게임 기획자가 아니지만, 제가 예전에 많은 시간을 온전히 거기에 바쳤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거의 모든 게임 개발업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내 마음에 꼭 들, 부끄럽지 않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래머들에 비해 제가 좀 유리한 점이 있긴 합니다. 언제라도 기획자의 입장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만. 저는 가능하면 늘 게임 기획자가 원하는 기능을 정확히 구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았거나 빠뜨렸던 것까지요. 가끔은 제게 '자꾸 그렇게 해주면 버릇만 나빠진다'거나 '네게 익숙해지면 다른 프로그래머와는 일하기 힘들어진다' 하고 충고해주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저는 예전에 기획자였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내가 언젠가 기획자였기에 유리한 점이 있다면(혹시나 조금이나마 그랬다면), 나중에 다시 게임 기획을 할 적에, 프로그래머였어서 유리할 점도 있을까? 하고요. 그 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만 돌이켜보니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가며 생각한 적은 없더군요. 이 글은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보고자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왜 기획서가 못마땅한가?

많은 프로그래머가 기획자나 기획서에 불만을 터뜨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프로그래머는 기획서가 완벽하지 않으면 코드를 한 글자도 짜지 않겠다기도 하고, 이 기획서 그대로 만들테니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기도 합니다. 다 좋은 게임 만들자고 하는 건데 그들이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냥 프로그래머들은 까칠한 성격이 많아서이거나, 까칠해야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일까요?

그들이 가능할 리 없는 --- 한치의 오류도 없이 정확한 기획서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일을 다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래머는 일을 대충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다시 해야 되고, 정해진 시간에 두 번 일을 하려면 대충하는 수밖에 없죠. 일이 갑자기 늘어나거나 일정이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을 때면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는 게 프로그래머입니다. 어느 수준을 넘으면 그만 자포자기하기도 하고요.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죠.

기획서에 있는 그대로 만들었다고 해서 기획자가 원하는 게임이 만들어진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획서 그대로 토씨 하나 차이 없이 만들어 내고 나면 기획자도 프로그래머도 고객도 모두가 불만족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일을 정말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사실 기획서가 아닙니다. 정말로 필요한 건 기획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거죠. 기획서는 기획자의 부분집합일 뿐입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하고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기도 하고, 알고 있는 것을 완벽히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기획서란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단초에 불과하죠.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대체 왜 그런 기획서를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만들어 내겠다고 하는 건가요? 뻔히 보이는 실수까지 그대로 말입니다. 좀 물어보면서 하면 안 됩니까? 간단한 오류는 스스로 고쳐서 하면 안 되고요?

그것은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지쳐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차피 결과를 알고 있기도 하고요. 기획서에 빠진 부분이나 논리적인 결함을 '해결'해서, 소위 빈 칸을 채워가며 개발하고 나면 자기가 들을 소리라고는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또는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다' 정도 아니겠습니까?

문제가 뭘까?

기획자와 프로그래머의 말이 모두 일리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이 왜 이 지경이 된 걸까요? 문제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기획자가 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은 이미 다 일어났습니다. 실수라는 실수는 다 벌어졌고요, 문제라는 문제는 다 발생했죠. 단어 하나에도 까다로운 프로그래머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오해도 하고요. 기획자란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기획서에 옮겨적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이지만 프로그래머는 그걸 그대로 만드는 것조차 못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글쎄,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군요.' '그럼 기획서나 제대로 써놓던지요!'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기획서는 별 게 아닙니다. 공백이 많은 기획서라도 좋습니다. 기획자의 의도만 확실히 알 수 있다면 그 공백을 유추하여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추한 결과가 맞는지 미리 알 수 있으면 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일이 다 벌어진 다음이 아니라 말이죠.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건 논리적 결함없이 섹시하게 잘 빠진 기획서가 아니라, 기획자 그 자체입니다. 기획서 따위 알 게 뭐에요. 기획서를 그대로 만든 게임이 재미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획자라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겠지만요.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내린 결론은 공백이 많은 기획서가 좋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끝나기 전에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쓴 글이라면 늘 오해가 있는 법이라고 말했죠?

한 줄 요약 -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기획서는...

사실 그들은 기획서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부분과 전체가 올바르게 제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기획자와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교감을 원하는 것 뿐이죠.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신고
Trackback 4 Comment 21

prev 1 next


티스토리 툴바